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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최용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평가를 위한 짧은 회고'

발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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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평가를 위한 짧은 회고

작성:최용주 2017.11.29

 

망각하기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나 아렌트

 

광주항쟁과 80총학

 

1980년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1980410일에 결성되어 1980517일 자정에

와해되었다.겨우 40일 동안 활동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가 “80총학이라고 약칭하고 있는 이 조직은 유신체제 하에서 지속적으로 숙성되어 온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역량이 총집결되어 태동된 상징적 산물이면서, 70년대 학생 중심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1980518일 이후 시민에 의한 조직적 항쟁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촉매의 역할을 담당했던 조직이다.그러므로 전남대학교 80총학 활동의 정리와 평가는 광주항쟁의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성격과 의의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되는 작업이다.

 

7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반독재 투쟁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국민들의 폭넓은 지지와 연대를 끌어내는 데에는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한계가 잘 드러난 사건이 이른바 1980515일의 서울역 회군이다. 수만의 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서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신군부의 퇴진을 외쳤지만,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얻어내는데 실패하고 결국 퇴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이 한계는 18년에 걸친 권위주의 독재 체제 하에서 억눌려있던 한국 시민사회의 정치적 한계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어떤 식으로든지 시민사회가 그 잠재적 열망을 드러내는 계기를 조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이러한 대중성을 갖추는 데 실패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확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광주는 달랐다.

 

80총학이 주도한 514일 도청 분수대 민주화성회는 박관현의 대중적 인기와 총학팀의 치밀한 준비에 힘입어 처음부터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서 열렸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이 시위를 멈추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때에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열린 516일의 횃불집회에는 수십만의 시민들이 동참하였고, 이 자리에서 광주시민들은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대한 잠재적 열망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광주 시민사회의 이러한 역동적인 에너지는 518일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폭력을 계기로 10일에 걸친 자치공동체를 이루었던 장엄하고 애국적인 시민저항의 자양분이 되었다. 517일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전두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다른 지역은 두려움과 침묵의 상태로 퇴행하였는데,왜 유독 광주만 조직적인 항쟁으로 발전했을까?여기에는 여러 설명변수들이 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유혈 폭력,지역차별,김대중의 체포,호남 특유의 저항정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시민들의 잠재적인 분노가 집단적으로 폭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지적이고 감성적인 변수는 국가폭력에 대한 불굴의 시민저항이자 민주화운동으로서 광주항쟁의 참된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사회운동사적 측면에서 광주항쟁은 1970년대 엄혹한 유신체제 하에서 학내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학생운동과 재야 중심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시민사회 및 기층민중과 연대를 형성하면서 그 외연을 시민운동(civilmovement) 수준으로 확대했던 최초의 사건이기 때문이다.그리고 80총학은 이러한 연대를 가능케 했던 조직적 매개기구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80총학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80총학에 대해 갖는 자긍심의 발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우리의 긍지는 긴 회한과 고통스러운 자책 그리고 억제하기 힘든 슬픔과 겹칠 수 밖에 없었다.

 

전사(前史)

 

80총학의 태동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1226일 박정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한국 정세 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의 방향과 관련하여 엄청난 혼란을 안겨주었다.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한 것은 확실한데 앞으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했다.박정희 사후 계엄령 발동으로 각종 사찰과 감시가 더 강화되어 활동은 위축되었으나,유신체제의 종말로 민주화와 정치발전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초기,

그러니까 12.12사태 전까지는 대체적으로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우세했는데, 이것은 객관적인 정세판단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이 가져다 준 막연한 희열에 기댄 것이었다.

11월 중순쯤 무등산장 근처 민박집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모였다. 여기에 모인 학생들은 시위모의사건인 인성다방 사건상담실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서광주경찰서에 연행되었다가 10.26 이후 훈방으로 풀려난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박정희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이들은 이제 한국사회는 민주화를 향한 피할 수 없는 도정에 올라섰으며, 여기서 학생들이 앞장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총학생회의 부활이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까지 소규모 서클이나 비공식 지하조직 중심으로 전개되던 학생운동이 학생회 중심으로 제도화”, “규모화”, 공식화되어야 할 필요를 공감하고 있었다.석방되면 무등산장 근처 민박집으로 만나서 총학생회 부활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잠정적으로 약속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무등산에서 만났고, 그 자리에서 광천동 들불야학 강학인 박관현을 총학생회 회장후보로 잠정적으로 추대하였다.물론 이 추대과정은 그 전에 여러 활동가 그룹과 선후배

간의 암묵적인 조율을 거친 것이었다.그리고 총학생회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 및 전략은

연말까지 차분히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0.26 이후 정치일정은 매우 불투명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212일 세계 정치사에서 가장 길었던 전두환의 쿠데타가 시작되면서 이 나라에 또 다시 군부독재 망령의 기운이 돌고,직선제 개헌 일정 역시 명확하지 않았다.재야는 힘이 없었으며,김대중은 아직 복권이 되지 않았고,야권은 분열되어 있었으며, 독재의 후광에 짓눌린 시민사회는 정치적으로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정체가 불분명하고 실권이 없는 듯 했다. 과도정부를 조종하고 있는 숨은 권력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확실치 않았다. 이런 과정을 목도한 학생들과 일단의 운동가들은 1980년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총학생회 부활 전단계로서 학원자율화운동부터 시작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학생들은 197912월 하순에 학원자율화 학생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새학기에 다가올 총학생회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예비작업을 추진하였다. 각종 공청회, 공술회 등을 열어서 학원자율화를 위한 제도 정비의 방향을 모색했으며,학생회 부활 일정 등을 토론하였다.

 

무엇보다도 유신체제 하에서 대학의 자율성을 옥죄고 있었던 각종 통제와 감시 장치들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가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학생들의 의사를 모아서 논의한 사항은 즉각적으로 공개하여 많은 학생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았고,대학당국과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해나갔다. 학자추위 주도로 학내 자치기구로 여학생회와 서클연합회를 먼저 설립하자는 의견이 있었고,학생회 조직체계 및 거버넌스 등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여러 논의를 거친 다음, 학생회 조직은 대의민주주의 조직체계를 따라서 집행기구인 총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 그리고 의결기구인 대의원총회로 이원화하여 견제와 균형의 자치 거버넌스를 갖는 구조로 가져가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전국의 대학들도 대부분 이런 거버넌스를 갖는 학생회를 구상하고 있었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활동으로 총학생회 구성 및 선거일정이 공고되었지만 학생회를 학생운동의 전위조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당선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학내에는 운동권과는 다른 사고와 이념, 행동양식을 가진 다양한 그룹들이 있었고 이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 자체가 학원 자율화와 민주화의 취지에 역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본질적으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화된 학생운동은 대중성과 보편성에 입각해야 하고,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내에 편재하고 있는 다양한 사고들과 이질적인 집단들을 포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중성의 확보는 당시 운동권에게는 가장 절박한 전략적 당면과제였다.

 

또한 당시 학내 운동권 집단도 이념적, 전략적 지향점이 전부 동일하지는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종속이론이나 모리스 돕과 같은 좌파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급진주의 계열에서부터 서구형 다원주의를 따르는 온건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했으며,사회과학 독서서클에서부터 문화운동패, 야학집단, 그리고 농민운동그룹 등 여러 형태의 조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민중이라는 다소 모호한 계급적 개념이 유행처럼 회자되었으며,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과 대의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자 그룹들도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었다.학생들이 탐닉하는 독서목록 역시 파울로 프레리,프란츠 파농,사르트르에서 이영희, 함석헌, 김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다양한 집단들은 유신체제 몰락 이후 민주화, 인권신장, 정치발전이라는 기본 목표에 대해서는 다 동의했으나 구체적인 정세판단과 추진전략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였고,이러한 이질성은 때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분열과 다툼의 여지가 되기도 하였다.

 

결국 학생들은 학내의 이러한 이질성을 포용하면서도 강력한 선동력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을

찾아야 했으며,학내의 다양한 세력들을 학생회의 우산 아래에 둘 수 있는 조직체계를 구비하고 있어야 했다. 총학생회 부활을 추진했던 운동권 집단은 일찍부터 이런 문제의식을 토대로

박관현을 총학생회장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운동권 학생들은 박관현을 학생회장 후보로

내세우고 즉각적으로 총학준비팀을 구성하였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하면서 총학준비팀은 학생운동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으나 의식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인물들을 보좌진으로 대거 섭외하였다. 운동권 특유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극복하고 다양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 학생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다.선거운동 과정을 통해서 박관현을 중심으로 기존의 운동권 집단과 비운동권 학우들이 전략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하였고,학원 자율화와 민주주의 쟁취라는 목표를 추진하기 위한 조직체계는 점진적으로 그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40일의 싸움

1980410일 박관현을 회장으로 출범한 총학생회가 당면한 현실적인 과제는 총학생회라는 공개조직을 통한 정치투쟁의 대중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 있었다. 총학생회는 운동권의 전유물도 아니며,학생회의 급진적인 투쟁노선은 활동의 인적 기반인 학우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하는데 한계를 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투쟁의 당위성과 추진의 대중성의 간극은 의외로 컸다.

 

특히 비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진출했던 의결기구 대의원총회와 집행기구인 총학생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총학생회의 거버넌스는 처음부터 총학생회의 부활을 주도했던 운동권 세력의 의도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그리고 원칙적으로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총학생회는 세가지 전략을 세웠다.첫째는 최규하 정부와 전두환 신군부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는 급진적인 대외투쟁은 당분간 전략적으로 자제하고, 학원 민주화와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인들을 제거하는 활동에 주력하여 학생들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로 한 것이다.학생회는 이 운동을 학원내 구잔재철폐 운동이라고 내부적으로 정리하였다.

 

둘째는 총학생회 내에 비공식 조직으로 비밀기획팀을 꾸려서 앞으로 필연적으로 도래될 수 밖에 없는 대외 정치투쟁에 대비하는 전략과 전술을 기획하도록 하였다. 비밀기획팀은 학내의 다양한 운동권 집단들이 중심이 되어 꾸려 나가되,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회 공식간부진과 확대전략모임을 통해 쟁점을 정리하고 방향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세째는 서클연합회 활동을 강화하여 투쟁의 전면에 나설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어용교수 퇴진 운동과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이 대표적인 학내민주화 운동이었다. 국내정세가 급변하게 되는 5월 초순까지 1달 동안의 학생회 활동은 대부분 이 두 현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은 전국의 다른 대학에서도 일제히 전개되고 있었으나, 어용교수 퇴진 운동은 일부 사립대학의 사학비리 투쟁의 경우를 제외하면 국립대학으로는 전남대가 유일했다.어용교수 문제는 복적생 그룹이 3월말에 어용교수백서를 발간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였으며,이를 총학생회가 넘겨받아 도서관을 점거하면서 어용교수 퇴진 농성을 전개하였다. 문리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어용교수 연구실 출입문을 못으로 봉쇄하는 정침식과 어용교수 장례식 퍼포먼스도 열었다.

 

별다른 진척이 없자 총학생회는 도서관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어용교수 퇴진 운동은 여러가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무엇보다 먼저 학자로서 자질이 없고 권력에 기대어 출세만을 바라는 교수들의 퇴진 운동을 벌임으로써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광범위한 신뢰와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학생운동이나 정치발전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도 이 문제만큼은 적극적으로 동참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탄탄한 동료의식과 연대를 키울 수 있게 되었다.나아가 학생들은 어용교수 문제가 교수 개개인의 품성과 자질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대학사회를 비롯하여 이 나라 모든 부문에 착근된 권위주의 유신 독재의 구조적 소산임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다.

 

병영집체훈련 반대 투쟁은 반공과 안보를 핑계로 대학을 병영화시켜서 학생들을 군사주의적 통제체제 하에 가두어 놓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는 점에서 비록 학내투쟁이긴

하지만 긴장도가 매우 높았던 투쟁이었다.자칫 잘못하면 계엄포고령이 아니라 반공법 등에도 저촉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그러나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은 이미 전국의 각 대학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고,대학 간 연대투쟁의 열기가 가장 높았던 사안이었다.비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도 교련이라고 불렸던 대학내 군사훈련에 대한 반감이 매우 높았는데, 학생회가 주최가 되어 교련교육 반대를 선언하자 이러한 반감은 자연스럽게 대규모 학내 집단행동으로 발전하였다.

 

병영집체훈련 반대 투쟁 역시 학생들의 비판적 사회의식을 고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어용교수 퇴진 운동과 병영집체훈련반대 투쟁 과정을 통해서 총학생회는 자연스럽게 당시 시국에 대한 견해 및 정치적 요구사항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총학생회는 4.19기념식에서 최초로 시국에 대한 견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정치발전을 대외적으로 요구했다.

 

총학생회는 4.19기념 성명서를 통해 계엄령 해제,정치발전 일정 공개,민주인사 석방 등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각 언론사에 배포하였다. 4.19성명서는 앞으로 전개될 학생회 정치투쟁의 개략을 대외적으로 밝힌 첫 문건으로 기록되었다.그러나 이 단계에서 학생회의 입장은 여전히 선언적이며 원칙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구체적인 행동지침이나 투쟁 방향에 대한 제시는 없었다.

 

학내의 분위기가 아직은 덜 성숙되었다고 판단했고,투쟁의 대상은 여전히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최규하 정부를 조정하고 있었던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아직은 막후에 있었다.

 

총학생회는 5월 초부터 학내민주화 문제에서 선회하여 본격적인 대외정치투쟁에 나섰다. 어용교수 문제와 병영집체훈련 거부 투쟁이 일단락되면서 동력을 학교 밖으로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며 학내 분위기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학생회는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총학생회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면서 정권의 실세로 부상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국내 정세에 엄청난 변화가 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은 이제까지 말로만 떠돌던 신군부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으며,결국 우리가 타격대상으로 삼아야 할 주적은 최규하 과도정부가 아니라 신군부 쿠데타 세력임을 재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총학생회 기획팀이 그렇게 판단했고,그 동안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수도권 대학 총학생회의 분석도 마찬가지였다.결국 총학생회는 58일부터 민족민주화성회를 교내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14일까지 계엄령을 해제하고 정치일정을 밝힐 것을 최규하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리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교문 밖 가두시위에 나설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물론 이런 투쟁 일정은 여타 주요 대학들과 사전 협의하여 조율된 것이었다. 58일 이후 계속해서 열린 교내 민족민주화성회는 그간 수개월에 걸친 학원자율화 투쟁과정에서 체득한 연대의식과 단체행동의 동력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 감동스러운 순간의 연속이었다.마치 꽉 막힌 병 속의 탄산가스가 일시에 터지듯 학생들은 여태까지 억제해 온 시국에 대한 불만과 민주화를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한순간에 폭발적으로 발산하였다. 여기에 박관현의 탁월한 연설능력이 더해져서 학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풍선과 같았다.교내집회는 긴장과 두려움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무슨 축제를 보는 듯했다. 학생들은 동토의 나라에 18년에 찾아온 정치적, 사회적 을 만끽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진짜 봄이 올 것으로 믿었다.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시작하면서 학생회는 앞으로 닥칠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고 이에 대응 가능한 모든 전술을 설계하고 심지어 도상연습까지 했다. 총학생회가 민족민주화성회 취지문에서 밝힌 유명한 문구처럼,“사태는 심각하고 추세는 불확실하며 낙관은 요원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언제든지 정세를 뒤집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비축하고 있었고,야권과 재야는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시민사회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18년간의 독재체제 하에서 체화된 두려움이 쉽게 극복되지 않은 탓이었다.

 

이런 정세를 감안한 총학생회는 시국이 이대로 가면 학교 밖으로의 진출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학생들만의 교내시위로는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을 얻을 수 없으며,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지 않으면 계엄령 해제와 정치발전은 요원할 것으로 생각했다.

 

총학생회를 비롯하여 학내 주요 운동권 그룹들로 구성된 비밀기획팀은 민족민주화성회 첫날부터 교외 진출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시내의 각 파출소, 계엄군 초소, 차단로 등을 파악해서 집회의 최종 목적지인 도청 앞 분수대 광장으로 집결할 수 있는 동선을 확보했다. 교문 밖으로 진출하게 되면 각 단과대별로 분산해서 계엄군과 경찰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다음 금남로 분수대 앞에서 집결하는 계획을 구상했다.

 

그리고 휴교령이 내릴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도 미리 세웠다.휴교령이

내릴 경우 교문 앞에 집결해서 대오를 정비한 다음 금남로로 행진한다는 계획은 학생들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총학생회는 민족민주화성회를 통해 유신 부활 세력 및 최규하 과도정부와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민족민주화성회의 극적인 순간은 514일에 찾아왔다.교내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일군의 학생들이 정문을 돌파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한 것이다.원래 교외집회는 15일부터 열기로 했는데 열기를 억누르지 못한 학생들이 경찰이 지키고 있는 교문을 뚫고 시내로 진출해버린 것이다.교문이 뚫리자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학생들이 늘어났고 수많은 학생들이 일거에 금남로를 통해서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였다.

 

학생들이 갑작스럽게 몰려오자 경찰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분수대 앞으로 모여들면서 근처의 시민들도 속속 합세하기 시작하였고 조선대와 광주교대 학생들도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분수대 광장은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 찼다. 금남로 제1차 민족민주화성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그리고 분수대 광장에 올라간 박관현은 제가 전대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사자후를 시작하며 일순간에 청중들을 압도했다. 1980514일은 박관현이 광주의 아들로 입양되는 날이었으며,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청 앞 분수대라는 공간에서 처음 조우하고 연대하여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에 대한 열망을 서로 확인하는 경이로운 날이었다.도청 앞 분수대광장에는 일순간 해방의 열기가 가득했다.

 

515일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서 제2차 민족민주화성회를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개최하였다.경찰과 사전에 합의를 거쳐 평화집회를 하기로 약속하였고 그 댓가로 전날 연행된 학생들이 풀려나기도 했다.놀라운 것은 그간 지켜만 보던 교수들이 대거 참여하여 대열의 맨 앞쪽에 서서 도보행진을 한 것이다.교수들의 참여는 시위가 격화될 경우 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인적 완충장치임과 동시에 시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 훌륭한 유인책이 되었다.15일 분수대 집회에서는 그 전날 보다 배가 더 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는데,상당히 많은 시민들은 14일 집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박관현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515일의 열기와 희열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이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갑자기 시위를 중단해버리고 철수해버린 것이다.이른바 서울역 회군사건이다. 16일 집회를 준비하던 총학생회에게는 뜻밖의 충격이었다. 배신감도 들었다. 15일 밤 총학생회와 기획팀 내에서는 수많은 격론이 오고 갔다.최규하 과도정부와 신군부 측에 우리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했으니 지켜보자는 측도 있었고, 집회를 계속 해서 끝까지 밀어부쳐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했다.그러던 중 신군부 측의 수상한 움직임들이 감지되기 시작하였다. 공수부대가 서울 외곽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고,15일 밤에는 전남대 인근에서 군부대의 이동이 목격되었다.대책회의를 열던 서울지역 총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어 갔다는 소문도 들리기도 했다. 엄청난 긴장과 두려움이 모두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던 그 날 밤, 총학생회는 16일 집회를 예정대로 개최하기로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그리고 16일 성회는 전두환, 신현확, 최규하 등 이 나라 민주화를 가로막는 적들을 화형에 처하는 횃불집회로 진행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사실 횃불집회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아이디어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까지 격론을 벌이다가 가까스로 결정되었다.

 

516.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이 숨죽이고 있을 때 유일하게 광주에서만 집회가 열렸고,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야간 횃불집회로 이어졌다. 도청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렸고 그 열기는 횃불의 온도를 압도해버릴 정도였다. 경찰들은 외곽 경비만 담당할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경찰은 이미 그 전날에 학생들의 평화시위를 제지하지 않겠다고 보장했다. 분수대에는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노동자,고등학생들까지 올라와서 발언을 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그리고 박관현은 비상계엄 해제와 정치발전,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했고,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을 했다.그의 연설이 주는 감동은 실로 대단했으며 그 선동성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그리고 횃불이 타오르면서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들을 연기 속으로 올려보냈다.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시국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공공의 공간”(public sphere)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박관현은 휴교령이 내리면 즉각 교문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단상을 내려왔다.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517.교정에는 꽃들이 만발했고 하늘은 더 말 할 나위 없이 푸르렀으며,공기는 따뜻했다. 그런데 도서관 앞 광장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했고 말 못할 팽팽한 긴장마저 감돌았다.우리는 아마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오늘이 우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 되리라는 것을.그리고 그 날 저녁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몇 개월 후 대부분 상무대 영창에서 다시 만났다.

 

박관현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후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두 인물인 박관현과 윤상원은 사실 한 몸이었다.박관현의 총학생회장 출마를 마지막까지 강력히 권한 인물도 윤상원이었으며, 학생회장 선거 유세 때 박관현이 입었던 양복은 윤상원의 것이었다.

 

박관현은 윤상원의 양복을 입고 윤상원과 함께 밤새워 토론하며 정리했던 생각을 학생과 시민 앞에서 발표했다.이 한 몸이 517일 자정을 기해서 두 개로 갈라졌다. 한 사람은 긴 잠행의 길로,그리고 또 한 사람은 총을 들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운명이었을까? 그리고 이 둘은 죽음으로 다시 만나서 한 몸이 되었다.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살육하고 있을 때 광주시민들은 도청 앞 분수대에서 애타게 박관현을 찾았다.부모인 광주가 죽어가는데 광주의 아들은 어디로 갔는가?박관현은 부름에 응하지 못했다. 박관현으로 상징되는 총학생회 구성원들 역시 이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불을 지펴서 뜨거운 열정으로 일어났던 수많은 동지들은 교문 앞에서,도청에서, 금남로에서 죽고 다쳤다. 그리고 박관현은 옥중에서 단식하다가 죽었다.

 

박관현은 사실 광주항쟁 중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살아남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아남은 우리를 옥죄는 회한과 자책은 오래 갔다.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청춘을 바쳤다는 자부심은 죽은 자 앞에 서면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그러나 자책과 회한으로

낭비하기에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너무 많았으며, 죽은 자들에게 진 빚이 이런 식으로 갚아지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바로 깨달았다.광주항쟁 이후 긴 잠행에서 깨어난 우리는 죽은 자의 유업을 잇는 산자의 몫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시작했으며,주저없이 그 일을 했다.때로는 좌절해서 회피하기도 하였으나 곧 제 자리로 돌아와서 서로의 눈을 쳐다봤고 서로를 격려했으며 앞서 간 동지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박관현이 죽고 난 며칠 후 미국 CIA 한국지부는 박관현의 죽음이 가져 올 한국 학생운동의 변화를 분석한 기밀문서를 작성해서 본국으로 보냈다.이 보고서는 앞으로 한국의 학생운동은 박관현 이후로 상징되는 이른바 광주세대”(Kwangjugeneration)가 주도할 것이며 한국의 정치발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이 광주세대가 바로 876월항쟁 세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우리는,비록 회한이 많은 세대이지만,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끈 광주세대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지키고 싶다.

 

주요 일지

1979.11.12 무등산장에서 총학생회 부활 논의 박정희 사망,계엄령

1980.2.14 학원자율화 학생추진위원회 결성 서울의 봄

1980.3.27 복적생 어용교수 백서 발간 서울의 봄

1980.3.31 학자추위 명으로 총학생회 선거일정 공고 서울의 봄

1980.4.9 박관현-이승룡 총학생회장 부회장 당선 서울의 봄

1980.4.10 총학생회 출범 서울의 봄

1980.4.19 총학생회 명의의 첫 시국선언문 발표 서울의 봄

1980.5.8 1차 민족민주화성회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직

1980.5.14 금남로 분수대 광장 제1차민족민주화성회 전두환 신군부 실권 장악

1980.5.15 금남로 분수대 광장 제2차민족민주화성회 전두환 신군부 실권 장악

1980.5.16 금남로 분수대 광장 횃불집회 전두환 신군부 실권 장악

1982.10.12 박관현 옥중 단식 중 별세 제5공화국

1985.10.12 전남대학교 80총학동지회 결성

1987 박관현열사 기념사업회 발족

박관현평전 발행

1996

박관현장학재단 설립

- 30명 수혜

-지급 장학금 누적액:

158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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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박관현열사 30주년 박관현평전 개정판 발행